​택배기사에서 물류기업 대표로 ‘자수성가’...인터뷰/ SG로지스틱 윤성구 대표

Author : Reporter_ / Date : 2015. 11. 16. 14:58 / Category :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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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 : 2015년 2월

​택배기사에서 물류기업 대표로 ‘자수성가’

어릴 적 꿈 놓지 않고 2집 앨범 발표해 가수로 활동

문의 및 제보 : logipress@hanmail.net



SG로지스틱 윤성구 대표는 올해로 만 34세의 젊은 경영인이다. 그는 택배기업의 지입기사로 시작해 물류기업 대표에 앉은 ‘자수성가형’ 인물이다. 게다가 그는 ‘윤성’이라는 예명으로 직접 작사 작곡한 음반을 발표한 2집 가수이기도 하다.

 

본래 가수를 꿈꿨던 그는 예술대학교에 진학하려고 했으나, 부모님의 반대에 가로막혀 광고홍보학과에 진학했다. 하지만 대학에 입학한 뒤에도 음악의 끈을 놓지 않고 밴드에 가입해 공연활동을 펼쳤고, 군대를 전역한 뒤로는 라이브카페 가수로 활동하면서 조금씩 본인의 꿈을 키워나갔다. 그곳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나 가정을 꾸렸다.

 

하지만 안정적이지 못한 그의 수입 때문에 가족들은 힘들어 했고, 결국 그는 음악이 비현실적인 직업이라고 생각하고 꿈을 접었다. 그때 그의 나이 24살이었다.

 

“그때가 아마 2003년 겨울이었을 거예요. 무작정 돈을 벌겠다고 트라넷택배라는 곳을 찾아갔어요. 회사에서 1톤차를 사오라고 하더라고요. 당시 1톤차 가격이 340만원 정도 했던 것 같은데, 돈이 없어서 결국 마이너스 할부로 샀어요.”

 

2003년 트라넷택배에 지입기사로 입사한 그는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녔다. 하지만 그가 손에 쥔 수입은 월 40만원 수준에 불과했다. 2000년대 초반만하더라도 지금처럼 택배물량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택배기사의 근무여건은 지금보다 훨씬 열악했다.

 

윤성구 대표가 이를 악물었던 게 이때부터다. 음악과는 담을 쌓았고, 텔레비전에 나오는 가수들의 음악도 일절 듣지 않았다.

 

“음악을 들으니까 자꾸 눈물이 나더라고요. 음악을 너무 하고 싶은데 그럴 수 없으니까… 이때부터 4~5년을 죽어라 일만했어요. 정말 얼마를 뛰어다니고 집하했는지 셀 수도 없을 정도예요.”

 

우연히 찾아온 기회, 인생을 바꾸다

 

음악과 벽을 쌓은 그는 트라넷택배와 아주택배 등을 거치며 동분서주하게 움직였다. 그렇게 몇 번의 계절이 바뀌면서 택배기사로서 그의 경력도 차츰 쌓여갔다.

 

그러던 중 그에게도 기회가 찾아왔다. 2006년 CJ CLS가 삼성물산 계열 택배업체인 HTH를 인수하면서 2007년부터 문산대리점 지점장을 맡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동업한 친구와 함께 38선 인근까지 사방팔방을 뛰어다녔다. 화주를 유치하기 위해 직접 영업에도 나섰다.

 

“대다수 영업인들은 명함을 주고받고 끝나는 경우가 많지만, 우리는 상대방 회사를 찾아가기 전 영업 전략을 세웁니다. 상대회사를 여러 차례 방문해 어떤 특성을 갖고 있는 회사이며, 소비계층은 누구이며, 무엇을 하는 회사인지 등을 철저하게 파악하고 분석합니다.”

 

이들이 화주사에 접근하는 방식은 체계화되어 있고, 분석적이다. 이 덕분에 화주사 관계자와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하면 원활한 소통이 가능하다. 이러한 부분에 신뢰를 느낀 화주사는 차츰 물량을 몰아줬다. 물량이 늘어나면서 대리점도 차츰 안정기를 찾아갔지만, 택배기사가 멸시 받는 것을 보면서 윤성구 대표는 전문물류기업을 설립해야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특히 이 시기에는 택배사간 경쟁이 치열하던 터라, 차별화된 전략이 절실하던 때였다.

 

전문물류기업 설립으로 ‘도약’


CJ CLS 문산대리점으로 사세를 확장해온 윤성구 대표는 2010년 전문물류기업인 ‘SG로지스틱’을 설립해 화주의 물류비 절감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가 화주에 전달한 메시지는 시간, 인건비, 인력 세 가지다.

 

SG로지스틱은 CJ CLS를 통해 배송인프라를 확보하고, 여기다 SG로지스틱을 통해 물류센터를 함께 운영하면서 화주사의 제품을 직접 포장하고 보관하면서 수요조절도 함께 했다.

 

결과적으로 직접 창고를 운영하던 화주 입장에서는 실시간으로 바뀌는 환율과 시장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할 수 있게 됐고, 통합물류시스템을 통해 물류비가 절감된 것은 물론 수요조절 능력까지 갖추게 됐다.

 

“택배대리점과 물류센터를 함께 운영하다보니까 여러 가지로 이점이 많았어요. 화주 입장에서는 포장과 보관, 그리고 배송을 한번에 해결해주기 때문에 시간과 인력, 인건비에 대한 부담을 덜었고, 저희는 화주와 끈끈한 파트너십을 형성함으로써 물량 이탈을 막았어요. 한마디로 서로 윈-윈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천원의 찐빵

 

SG로지스틱은 지난해 11월 파주시 조리읍 뇌조리에 사옥을 마련하고 둥지를 옮겼다. 이제는 직원 30여명을 거느린 어엿한 전문물류기업으로 안착했다. 물류기업 대표로서 그가 직원들에게 강조하는 것은 확실한 상벌제도다.

 

윤성구 대표는 매주 월요일 1~2시간 동안 직원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그가 직원들에게 강조하는 것은 서비스 정신이다. 이를 위해 상시적으로 자사의 서비스에 대한 고객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이를 통해 내부적으로 직원에 대한 평가를 진행한다. 이를 잣대로 고객에게 친절하고 업무에 빈틈없이 일을 잘하는 직원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인센티브를 지급하고, 업무능력이 떨어지거나 서비스가 좋지 않은 직원에게는 경고를 한다.

 

“아마 2005년쯤이었을 겁니다. 길거리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찐빵을 보고 너무 먹고 싶었거든요. 근데 당시 단돈 천원이 없어서 그냥 지나쳤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도 진빵만 보면 그때 생각이 나서 가슴이 좀 아프죠. 저도 고생을 많이 해봤기 때문에 열심히 일하는 직원들에게 충분히 그에 상응하는 대우를 해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택배기사로 물류업계에 발을 들인 윤 대표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대리점 지점장을 맡아 결국에는 전문물류기업을 만들어냈다. 이제 고작 그의 나이 만 34세에 불과하다. 그가 걸어온 인생의 발자취는 우리나라 청년들에게도 귀감이 된다. 그가 청년들에게 강조하는 것은 무엇이 됐건 일단 무작정 부딪쳐보라는 것이다.

 

“저는 어린 나이에 택배기사로 시작해서 전국 최연소로 지점장을 맡았어요. 실제로 물류현장에는 인력이 없어서 고민인데, 젊은 친구들은 일자리가 없어서 고민입니다. 저는 택배만큼 세상을 넓게 볼 수 있는 직업이 없다고 생각해요. 누구라도 한번쯤은 겪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택배를 해본 사람들은 알거예요. ‘정말 힘들구나’ 그렇기 때문에 이 일을 했던 사람들은 사회에 나가서 어떤 일이라도 잘해낼 거라고 생각해요.”

 

가수 ‘윤성’

 

음악인으로서의 삶도 다시 시작했다. 어느 정도 생활이 안정화되자, 그는 다시 음악을 찾았다. 우연한 기회에 밴드에 가입했고, 그곳에서 가수 푸른하늘의 멤버였던 이동훈씨를 만났다. 당시 국방FM 라디오 DJ를 맡고 있던 이동훈씨는 윤성구 대표가 가수 윤성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줬다. 이 덕분에 2012년 1집 앨범을 발매했고, 지난해에는 2집 앨범을 발매하고, 콘서트를 개최하기도 했다. 콘서트로 벌어들인 수익금은 전액 기부했다. 몇 해 전에는 환우콘서트를 통해 재능기부를 한 적도 있다.

 

“제가 가수를 해서 대단한 성공을 이루겠다는 것이 아니라, 제가 갖고 있는 재능을 나누고 이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전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 겁니다. 앞으로 환우콘서트를 비롯해 문화적으로 소외된 계층을 찾아 제가 갖고 있는 재능을 기부하고 싶습니다.”

 

회사의 발전계획도 세부적으로 세웠다. 지면을 통해 그의 계획을 세세하게 밝히기는 어렵지만, 매순간 계획을 세우고 달성해왔던 그의 과거 발자취를 보면, 그가 꿈꾸는 목표가 이뤄질 것이란 생각이 든다. SG로지스틱의 10년 뒤가 기대된다. 


출처 : <코리아쉬핑가제트>


다음은 가수 윤성이 부른 '김광석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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